국립스포츠박물관 전체메뉴

사진/필름

두 번의 임오년, 한국축구사의 분기점
  • 등록일2019.07.31
  • 조회수44
색인어
기증자 조영달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재임(2001~2003) 당시 입수한 2002 한일월드컵 관련 자료 9점과 2014년 브라질월드컵 자료 1점 등 총 10점의 유물을 기증하였다. 본 유물은 2002 한일월드컵에 참가한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공인구로, 월드컵 4강 신화의 성과를 기리는 청와대 오찬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처음 접한 지 120년만의 일이다.

1882년(고정 19년) 6월,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가 인천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플라잉 피시호의 선원들은 부두에 상륙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펴고 있을 때였다. 관가의 허가 없이 상륙한 선원들은 조선의 관리에게 쫓겨 급하게 부두를 떠나게 되었다. 아이들은 선원들이 급하게 떠나며 두고 간 물건을 주워 영국인들이 하던 행위를 따라했다. 그들이 놓고 간 물건은 바로 축구공이었다. 그로부터 1개월 뒤에 제물포에 입항한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의 선원들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한성으로 들어갔고 훈련원 공지에서 축구를 하였으며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공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영국을 통해 축구를 접한 조선은 18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팀인 대한축구구락부를, 1906년 3월에는 최초의 정식 축구팀 대한체육구락부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받아들였으며 1933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되었다. 축구의 보급과 발전에는 학교 운동회와 단체, 그리고 언론사가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일보사와 조선중앙일보가 각각 주최한 '경평전(京平戰)'과 '전조선 시도대항 축구선수권대회'는 당시 매우 큰 관심을 끄는 대회였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운도오히와 축구대회의 특성은 단순히 축구를 보급하는 역할뿐 아니라 일본에 억눌린 감정의 분출과 민족의식 배양의 장이 되었다. 이는 당시에 축구를 비롯한 다양한 경기가 발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마찰을 우려하여 연합운동회 금지령(1910)을 선포해 운동회의 장소를 교내로 제한하였으며, 언론사 주최 대회를 독립운동과 결부시켜 해당 언론사를 폐간시키는 등 운동회와 축구대회를 축소하고자 하였다.

광복 후, 한국축구는 세계축구계의 일원이 되었다. 1948년 5월에 국제축구연맹(FIFA) 가맹국이 되었고 1954년 5월에는 아시아 축구연맹(AFC)에 정식 가입하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통해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였으며 1986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1990년 이탈리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2002년 한국/일본, 2006년 독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2014년 브라질을 거쳐 2018년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특히 2002년에는 4강에 진출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2006년 원정 첫 승, 2010년에는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었다. 최근에 있었던 2019 FIFA U-20 월드컵에서는 한국축구 최초로 FIFA 주관대회 결승전에 진출했고 이강인 선수가 골든볼을 수상하였다.

1882년 임오년, 처음 축구를 접한 이후로 한국축구는 느리지만 조금씩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02년 임오년, 한일월드컵은 한국축구의 성과이자 미래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축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담은 이 사인볼은 한국축구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김희태(전시준비팀 학예연구사) 
목록